2013

"장마딩의 여덟째 날 / 리루이 / 삼화"

쎄인트saint 2013. 1. 14. 09:37

 


장마딩의 여덟째 날

저자
리루이 지음
출판사
삼화 | 2012-12-08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신념을 지키려 했던 사람들!세계가 주목하...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최근 믿음의 글들과 폭력, 죽음에 관한 책들을 연이어 읽었습니다. 이 소설은 이 키워드들이 그대로 녹아 들어있습니다. 리루이라는 대단한 작가를 만나게 된 것도 큰 행운입니다. 아마 종종 이 분의 책을 찾게 될 것 같습니다.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서 무언가 가슴을 꽉 채워나가는 느낌이 들었지요. 아마도 살아가며 생각할 부분들을 많이 남겨 주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자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한국의 독자들에게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최근 1,2백 년 동안에, 지구촌의 대다수 나라와 사람들은 너도나도 ‘현대화되는’역사를 살았습니다. 다른 문화와 민족, 다른 가치와 전통, 다른 지리적 공간에 따라 천차만별로 살아가는데도 불구하고 너나없이 ‘현대화되는’ 과정에서 많은 비슷비슷한 경험과 기억을 갖게 된 것입니다.”

 

기억의 공존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공감이 가는 부분입니다. 시대적인 흐름은 어느 바다 한 가운데서 만들어지는 태풍처럼 또는 이념의 지각 변동을 통해 지구 이끝에서 저끝으로 이동합니다. 이 소설의 배경은 1900년의 중국입니다. 1900년 전후 시기는 근대 중국이 세계와 맞닥뜨려서 가장 광적이었고 가장 굴욕적인 때였다고 합니다. 어쩌면 저자 리루이는 이 아픈 상처를 들어내서 지나온 길을 잊지 않게 해주려는 숨은 의도도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과거를 알면 현재를 이해할 수 있고, 현재를 알면 미래를 바라보는 안목이 생기지요.

 

믿음(신앙)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인간에게 종교는 일부일 수도 있고, 전부일 수도 있습니다. 전부라는 것은 목숨조차도 아깝지 않게 내어 줄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오히려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축복으로 받아들입니다.

 

이 소설의 중심인물 장마딩은 누구인가. 원래 이름은 지오반니 마틴입니다. 그 뒤에는 가톨릭 사제인 꼬르 주교가 있습니다. 가톨릭은 당대, 원대에 중국에 전파되었고, 명대 말기에 재차 권토중래하면서 많은 지도자급 인사들이 입교, 세례를 받게 됩니다. 가톨릭을 비롯한 서양 종교가 확산되는 만큼 거센 반발이 야기됩니다. 1900년 의화단운동은 중국의 토속 신앙과 서양 종교가 벌이는 전쟁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중심세력인 의화단[義和團]은 백련교(白蓮敎) 일파로 불리는 종교적 비밀결사로서, 당사의 사회모순, 기독교 포교, 독일의 진출 등에 반감을 품고, <부청멸양(扶淸滅洋)>을 부르짖으며 무력적 배외운동을 전개했습니다. 1899년 산동 서부에서 폭동을 일으키고, 외국인 특히 기독교도를 박해했으며, 청조에서도 이를 선동해 폭동이 확대되었습니다. 엄청난 선교사와 신도들이 피살되고, 파괴된 성당, 병원과 민가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 끔찍한 참상은 세계를 놀라게 할 정도였습니다. 이 역사적 기록을 더듬어 가다보니 청나라 말기의 40여년 독재 권력자인 서태후(西太后)가 연결됩니다. 의화단이 원래는 반청(反淸)단체였는데, 서태후가 이들을 회유해서 열강 8국( (러시아, 일본, 영국, 프랑스, 미국, 독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헝가리)과 대항하게 했습니다. 좀 무모했지요. 아니 많이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국내 사정은 얼마나 심각했겠습니까. 치안부재 상태였지요.

 

이런 참혹한 신앙의 대립 사건이 일어나기 전 15년 동안 꼬르 주교는 중국에서 하느님을 전도하면서 얻은 성과에 만족해서 이탈리아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다시 중국에 갈 꿈과 사명감에 불탑니다. 꼬르 주교는 각지를 다니면서 선교 후원을 호소하는 한편, 마땅한 조수 한 명을 중국으로 데리고 가고 싶어 합니다. 그 대상에 지오반니 마틴 수사가 선택됩니다. 그리고 그에게 중국 이름 '장마딩(張馬丁)'을 지어줍니다.

 

그들의 선교지인 하늘어미 강 하늘바위 읍에서 서로의 믿음(신앙)을 지키려는 어쩔 수 없는 충돌이 일어납니다. 의화단의 분위기가 서서히 열기가 더해지고 있는 시점이기도 합니다. 목숨 걸고 하늘어미 사당을 지키려는 영신회 우두머리 장톈츠가 폭력을 행사하자 장마딩은 꼬르 주교를 보호하려다가 맞아 죽습니다. 이 사건이 정치와 종교 분쟁의 발단이 될 조짐을 보이자 현령 쑨푸천은 지체없이 장톈츠를 잡아들여 참수하고 조리돌림 하는 것으로 사건을 매듭짓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 예수님이 무덤에서 부활해서 나오듯 장마딩이 일어납니다. 그러니까 가사 상태 였던 것입니다.  다행히 장마딩을 아들 처럼 돌보던 마리아 수녀가 곧 사제가 될 그에게 입혀 주려했던 옷을 마무리해서 수의로 해주겠다는 바람에 장례를 늦춘것이지요. 예수님의 부활은 기독교인들에게 부활신앙의 기점이 되지만, 장마딩의 부활은 매우 복잡한 상황이 되고 맙니다. 죽은 줄 알았던 사람에 대한 죄값으로 이미 참수당한 사람은 어찌 하나요.  꼬르 주교는 대단한 결정을 내립니다. 그가 다시 살아났다는 사실 자체를 은폐하려합니다. 그리고 장마딩에겐 그의 관을 보여주며 '죽은 셈'치라고 합니다. 그리고 일단 성당에 숨겨서 몸을 회복시킨 다음 로마로 보낼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반전이 일어납니다. 장마딩은 바깥 세상에 본인이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려야 한다고 고집을 부립니다. 아니 그의 믿음이지요.

 


이럴 때 꼭 이말이 제격입니다. 자의반 타의반 성당을 떠납니다. 성당 밖을 나서면 어찌 되리라는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나, 장마딩의 마음은 한결 같습니다. '진정 내가 돌이킬 수 없는 잘못된 길을 선택하고 만 것일까? .....하느님은 아시겠지. 진정 내가 아무도 속이지 않고, 진정 내가 가장 성실한 결정을 한 것 뿐이라는 걸.....'

 


이후의 장마딩의 주변에 많은 사건이 생깁니다.  그 중 하이라이트는 장마딩과 장마딩이 죽은 줄 알고 그 죗값으로 참수 당했던 장톈츠의 아내 장왕씨와의 만남입니다. 사실 장왕씨는 그녀의 남편이 참수당하는 모습을 한 순간도 안 놓치고 보았기 때문에, 정신줄이 놓여진 상태였습니다. 아주 놓여진 것은 아니고, 당겼다 풀렸다 하긴 합니다만..잠시 신내림까지 와서 삼신 할미 대접을 받는 상황에 장마딩이 그 사당을 찾아 온 것 입니다. 추운 밤길을 헤매던 장마딩이 어슴푸레한 불빛을 보고 사당에 달려 들자 마자 쓰러집니다. 장왕씨는 그녀의 남편이 환생한 것으로 믿고 있군요. 아니 그렇게 믿고 싶은 모양입니다. 그렇게 죽은 남편을 다시 만난 듯 지극 정성으로 그를 살려내고, 그가 살아 있는 동안 그의 흔적과 에너지가 이 땅에 남아 있도록 일을 계획합니다.

 

그 사이 꼬르 주교와 신도들은 의화단에 의해 희생됩니다. 성당도 파괴됩니다. 거의 초토화됩니다. 의화단의 기세는 사그러질 줄 모릅니다. 하늘어미 사당을 지키는 마을 사람들은 장마딩을 찾아서 복수를 하겠다고 온 마을을 다 헤집고 다니고, 삼신 할미 역할을 맡고 있는 장왕씨 덕분에 위해를 당하진 않지만, 동상후유증인 패혈증으로 결국 숨을 거둡니다. 숨을 거두기 직전, 마리아 수녀가 찾아올 것이라는 예감에 혼신을 다해 글을 남깁니다. 그의 묘비명입니다. 

 


      진실한 사람 장마딩의 무덤

 


여러분의 세계는 일곱 날 안에 머물지만,

나의 세계는 여덟째 날부터 시작된 것이다.

 


"여덟째 날"..전혀 다른 스토리이긴 합니다만, 1996년에 벨기에, 프랑스에서 제작된 "제8요일"이라는 영화가 생각납니다. 태초에 하나님은 바쁘셨습니다. 일주일 동안 매일 분주하셨지요...여섯째 날엔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습니다. 그리고 여덟째 날엔 무엇을 하셨을까요? 다음날인 8일은 8요일의 창조, 즉 그리스도의 부활을 의미하는 날이라는 해석을 내리기도 합니다. 여덟째 날은 억제되었던 인간성의 재생을 의미하는 요일이기도 하답니다. 과연 그랬을까요? 장마딩에게 '여덟째 날'이 주는 의미는 무엇이었을까요? 좀 더 생각해봐야겠습니다. 어쩌면 나에게도 주고 싶은 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저자 리루이는 중국 문단에서 대표적인 반서구지향적인 작가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당대 중국 문단에서 가장 존중받는 작가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 소설의 구성은 탄탄합니다. 표지 그림인 '슬프도록 아름다운' 한 여인의 초상을 보고,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다가 많은 생각을 하면서 책을 덮습니다. 초두에 언급해드린 것처럼 믿음에 대해, 인간 내면에 두텁게 깔려 있는 폭력성에 대해, 나눔과 화합에 대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저자는 그 혼돈의 시기를 차분하게 그려나가면서 결국은 화합만이 인류가 살아갈 희망이라는 것을 암시해주고 있습니다. 장마딩이 숨을 거두면서 장왕씨에게 남긴 말입니다. "나중에 내가 죽으면 내가 가지고 온 초에 불을 붙여서 내 정수리 앞에 놓고, 그런 다음에 한 마디만 해 주십시오!.....한 마디만... 그냥 '할렐루야'라고...."

 


이 뜻을 모르는 장왕. 삼신 할미는 그가 남긴 말을 잊지 않습니다. 심한 가뭄이 이어지던 땅에 장마딩이 숨을 거둔 후 이젠 노아의 홍수처럼 비가 내립니다. 온 마을이 물에 잠기고 비교적 높은 곳에 위치한 하늘 어미 사당이 있는 하늘바위에 호흡있는 자들이 모두 모여듭니다.  이제 그곳도 넘실거리는 큰물이 덮칠 지경이 됩니다.

 

장왕씨는 두 손을 모으고 무릎을 꿇고 땅에 엎드리며 큰 소리로 외칩니다.

"할렐루야!"  "삼신할미, 보우하사!"

그러자, 사당 안팎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순간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습니다. 아무도 사당에서 이러한 기도를 들을 것이라곤 생각지 못햇지요. 그러나, 결국 모두 한 목소리로 따라합니다.

전체적인 글의 흐름을 모르고 문자해석만으론 오해의 소지가 있겠지요. 이 부분은 저자의 간접적인 기원일 것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P.S : 이 책의 역자인 배도임 교수의 번역이 매우 맛깔스럽습니다. 생동감이 있습니다. 육두문자가 툭툭 튀어나오지만, 전혀 생경스럽지가 않습니다. 아마 이 책의 텍스트보다도 더 감칠맛 나는 표현이 많지 않을까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